한국이 싫어서...
세월호 사건이후 한국을 떠나려는 이민 상담이 평소에 비해 5배이상 급등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죽하면 저럴까... 무능하고 아니한 마음이 가져온 참사와 비극
인간의 욕심은 끝이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홍익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취업에 실패하고, 그냥저냥 금융회사의 카드 승인 상담을 해주는 일을 3년 정도 해오던 중 지긋지긋한 굴레이서 벗어나고자 호주 시민권에 도전한 주인공
호주에서 힘겹게 살다 우여곡절 끝에 시민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 사랑, 도전,
을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미있게 각색한 책이다.
한 때 아니 지금도 그렇겠지, 호주 워킹할러데이가 유행하던 시절, 나역시 그때 뉴질랜드로 떠났었지 ㅎㅎㅎ, 어디를 가도 쉽지 않은 삶이겠지만, 그래도 똑같이 힘들거면, 안전과 보장이 주어지는 곳에서 힘들게 사는게 낫지않을까?
거기도 힘들어, 인종차별에, 말도 안통하고, 차라리 여기 있는게 나아... 그래 ... 넌 그렇게 살아라, 해보지도 않고 다른사람들 말에 지래 겁을 먹고 그냥 현실에 안주하고, 그렇게 물 흐르듯 살아라...
슥~ 한번 편하게 읽기 좋은책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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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회사에서 일할 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 같아. 내가 어떤 조직의 부속품이 되어서 그 톱니바퀴가 되었다 해도, 이 톱니바퀴가 어디에 끼어 있고 이 원이 어떻게 굴러가고 이 큰 수레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그런 걸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난 내가 무슨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회사는 뭐 하는 회사인지 모르겠고, 온통 혼란스러웠달까. 아니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 중고생과 다름없었던 거 같아.
그러니까 일이 당연히 재미가 없고, 일이 재미있다는 말이 뭔지도 모르고, 하고 싶은 일? 그게 뭔 소리야. 고객들 컴플레인하면 그건 듣기 싫고, 회사에는 정을 주지 않고 뚱하니 앉아 있었으니…….
“넌 왜 이민 오려는 건데?” 하고 묻더라.
“한국에서는 딱히 비전이 없으니까.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
“한국 애들은 제일 위에 호주인과 서양인이 있고, 그다음에 일본인과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지. 그 아래는 중국인, 그리고 더 아래 남아시아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데 사실 호주인과 서양인 아래 계급은 그냥 동양인이야. 여기 사람들은 구별도 못해. 걔들 눈에는 그냥 영어 잘하는 아시안과 영어 못하는 아시안이 있을 뿐이야.”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려면 위험하게 살아야 해, 키에나.”
한국 왜 이렇게 후지냐.”라며 공감해 주는 거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냐. 근본적인 해결책은 힘이 들고, 실행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니까. 회사 상사에게 “이건 잘못됐다.”라고, 시어머니에게 “그건 싫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무서운 거야. 걔들한테는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이 너무나 소중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데, 내가 뭘 하겠다고 나서건 그게 성공할지 성공 안 할지는 몰라. 지금 내가 의대 가서 성형외과 의사 되면, 로스쿨 가서 변호사 되면, 본전 뽑을 수 있을까? 아닐걸?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직업이 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전망 얘기하는 건 무의미한 거고, 내가 뭘 하고 싶으냐가 정말 중요한 거지. 돈이 안 벌려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좀 덜 억울할 거 아냐. 지명이가 그렇게 자기 진로를 선택한 거지. 그런데 난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몰랐어.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 돈 걱정 안 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 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 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거나, 자전거를 탄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자존심이랄까 존엄성이랄까 그런 것까지 팔고 싶지는 않아.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 줄 거야. 자존심 지켜 주면서도 일 엄격하게 시킬 수 있어. 또 여유가 생기면 사회를 위해 작더라도 뭔가 봉사를 하고 싶어.
추위를 싫어한 펭귄’이라는 제목이었어. 표지에는 펭귄 한 마리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을 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지. 펭귄이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어. 뒤로는 그 펭귄이 사는 이글루가 한 채 보이고. 주인공 펭귄 이름이…… 파블로! 파블로였어.
파블로는 펭귄이지만 추위를 싫어했어. 평소에는 이글루 안에 틀어박혀서 난로를 피우고 사는데, 친구들이 억지로 밖으로 불러내지. 그랬다가 물에 빠져서 몸이 꽁꽁 얼어서 집으로 돌아와. 커다란 얼음에 갇힌 파블로를 친구들이 난로 위에 올려서 녹이지.
파블로는 따뜻한 열대지방으로 떠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해. 처음에는 아마 난로를 짊어지고 스키를 탔을 거야. 하지만 또 얼음 기둥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다음에는 몸에 핫 팩을 두르고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열대를 향해 걸어가.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
마지막에는 자기 이글루와 집 주변 얼음을 통째로 잘라 얼음 배를 만들어. 항해는 처음에는 순조로운 듯하지만 점점 배가 녹기 시작해. 나중에는 아주 작은 얼음 조각밖에 남지 않지. 그 얼음 조각이 녹아 사라지는 순간 파블로는 펄쩍 뛰어 자기 욕조에 들어가서는 그 욕조를 새로운 배 삼아 항해를 계속하지.
파블로는 결국 하와이처럼 생긴 섬에 도착해.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파란 바다 앞에 모래사장이 있고 야자수가 있고 거북이가 다녀. 마지막 장면이 이래. 파블로가 선글라스를 쓰고 야자수 사이에 해먹을 쳐서 그 위에 누워 있는 거야. 음료수를 마시고 부채를 부치면서. 그 아래 이런 멋진 글귀가 있었어.
“다시는 춥지 않을 거예요.”
나는 동화책의 마지막 문장을 입 밖에 내어 말했어. 내 목소리를 들은 지명이 몸을 잠시 뒤척이며 신음하더라.
친구 펭귄들이 파블로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을까? 그냥 참고 살라고 말이야. 다들 그렇게 산다고. 파블로한테는 헤어지기 어려운 피붙이나 애인은 없었을까?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한국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아. 망하든 말든, 별 감정 없어…….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라면 더 쉬울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밥을 먹는 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애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자기 행복을 아끼다 못해 어디 깊은 곳에 꽁꽁 싸 놓지. 그리고 자기 행복이 아닌 남의 불행을 원동력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거야. 집 사느라 빚 잔뜩 지고 현금이 없어서 절절 매는 거랑 똑같지 뭐.
정말 우스운 게, 사실 젊은 애들이 호주로 오려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대접 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접시를 닦으며 살아도 호주가 좋다 이거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
한국에서는 수도권 대학 나온 애들은 지방대 나온 애들 대접 안 해 주고, 인서울대학 나온 애들은 수도권 대학 취급 안 해 주고, SKY 나온 애들은 인서울을, 서울대 나온 애들은 연고대를 무시하잖아. 그러니까 지방대 나온 애들, 수도권 나온 애들, 인서울 나온 애들, 연고대 나온 애들이 다 재수를 하든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아마 서울대 안에서는 법대가 농대 무시하고 과학고 출신이 일반고 출신 무시하고 그러겠지.
그런데, 그 근성 못 고치면 어딜 가도 똑같아. 호주에 와서 교민이 유학생 무시하고 유학생이 워홀러 무시하는 식으로 이어져. 그 근성 고치려면 자산성 행복을 좀 버리고,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해야 해.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이라는 계나의 말은 영화 「람보 2」 마지막 장면에서 존 람보의 대사를 비튼 것입니다. “For our country to love us as much as we love it. That’s what I want.”
1 국민을 내쫓는 국가
경기도 화성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에 화재가 발생한 것은 1999년 6월 30일 새벽이었다.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불법 조립식 건물은 유독 가스를 내뿜었다. 화재경보기는 불량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신고가 접수되었고 소방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치원생 열아홉 명과 인솔 교사 네 명이 숨졌다. 여섯 살 된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한 어머니가 실신했다. 그녀는 전 필드하키 국가 대표 선수이자 88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였다. 세계에 한국을 자기 자신으로 자랑스럽게 표상하던 어머니는 조국을 신뢰했다. 그러나 정부는 사고 대책과 진상 규명 대신, 책임 회피와 사건 축소에 힘을 쏟았다. 더 이상 그녀는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해 11월 어머니는 뉴질랜드 이민을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국가 대표 선수로 딴 메달과 훈장은 국가에 반납했다. 이 나라가, 이 나라이던 어머니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을 저버린 쪽은 그녀가 아니라 한국이었다. 그리고 15년 뒤,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한국인이 한국을 등진다는 말이 틀렸음은 단언할 수 있다. 오히려 한국이 한국인을 나가라고 등 떠미는 상황이다. 마침내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실은 한국이 떠나라고 부추긴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이렇게 말한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그녀에게 인내심이 부족하다느니, 고생을 덜 해 봤다느니 식의 비난은 하지 말자. 돌고 돌아 결국 자기 계발로 귀결되는 꼰대의 무의미한 언사는 이미 차고 넘친다. 의미 있는 논평을 하고 싶다면 우선 계나의 이야기부터 잘 들을 필요가 있다.
타고난 재력이 없다면, 나머지는 그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날이 갈수록 인생 역전을 빌며 매주 복권 사는 사람만 는다. 공정에 기댈 수 없는 사회에서, 우연에 기대는 현상의 증가는 필연이다.
진짜 까다로운 주체는 누구인가. 계나 스스로 자신을 까다롭다고 수긍하게 만든, 내면화된 ‘사육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소나 돼지인 양, 축사에 가두어져 주인이 주는 대로만 먹고 살다가, 돈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길들임의 체제가 한국에서 스스럼없이 작동하고 있다. 거기에서 창출된 이득은 주인에게만 온전히 돌아간다. 그러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가축인가. 외양만 보면 구별되지 않지만 방법은 간단하다. 사육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 편이 주인이고, 사육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편이 가축이다. 배분되는 사료에 만족하라고,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면 위험하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가 바로 주인이자 거꾸러뜨릴 대상이다.
정글과 축사는 상반된 공간으로 간주된다. 정글은 경쟁하여 생존하는 장이고, 축사는 관리되어 생존하는 장이다. 그런데 정글의 법칙과 축사의 논리가 한국에서는 혼융되어 나타난다. 가장 부정적인 점만 취합한 방식이다. 본래 양자는 가치 판단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가령 자연 상태에서 개체가 서로 각축을 벌이며 적자생존을 도모하는 것(정글의 법칙)과, 인공 상태에서 특정 개체를 번식시켜 양적 생산을 증대하는 것(축사의 논리)은 좋고 나쁨·옳고 그름의 구별이 적용되지 않는다.
가까이에서 보면 정글이고, 멀리서 보면 축사인 장소가 한국이다.
뭔가를 성취한 기억으로 조금씩 오랫동안 행복감을 느끼는 ‘자산성 행복’이든, 어떤 순간 짜릿한 행복감을 느끼는 ‘현금흐름성 행복’이든, 효율성의 잣대로 손익을 계산하는 한 계나는 행복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동생 ‘예나’가 사귀는,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한다는 남자 친구를 평가하는 그녀를 보라. 계나는 본인이 여태껏 냉소적으로 비판하던 사람들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그녀는 쉽게 행복해지기 위해 호주 이민을 단행했다고 말한다. 솔직하고 구체적인 속내는 이렇다. “내가 호주에 간 것은 내 신분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한 일이야.” 지명의 가족에게서 신분 차이의 굴욕을 절감했으므로, 계나는 신분 상승이야말로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고 신봉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경제적 감각에 침윤된 관점이 변하지 않으면 그녀는 틀림없이 불행해진다.
실상 한국 사육장의 외부에는 외국 사육장이 있을 따름이다. 달아나도 가축으로밖에 생존할 수 없다.